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침공 (문단 편집) === 프랑스의 항복 === ||[[파일:Second World War Europe 06 1940 de.pn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2px-Adolf_Hitler_in_Paris_1940.jpg|width=33.3%]][[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H28708,_Paris,_Eiffelturm,_Besuch_Adolf_Hitler.jpg|width=33.3%]][[파일:external/www.museumsyndicate.com/56512.jpg|width=33.3%]]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417335-1BC1D281000005DC-652_964x654.jpg|width=100%]] [[파일:파리 시민의 눈물.png|width=100%]] || ||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 맨 아래의 사진은 오랫동안 [[https://www.ww2incolor.com/gallery/dramatic-photos/16139/weeping-frenchman|파리 시내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보는 파리 시민의 눈물이라 알려졌지만]] 최근에 [[https://dzen.ru/media/id/5cb4dcd64ac08900b36a3ab0/plachuscii-francuz-1940-5cb4ea26bccc8900b2ef7a0d|마르세유에서 아프리카로 철수하는 자유 프랑스군의 행렬을 보는 마르세유 시민의 사진이라고 밝혀졌다]].--뭐 여전히 프랑스의 치욕의 눈물인 건 맞다--] || >“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적에게 요청했습니다. 군인으로써 이런 가슴 아픈 결정을 내린 것은 군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 >― [[필리프 페탱]], 항복할 당시 연설에서 프랑스는 항복했다. [[독일]] 방송은 항복 연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라디오로 내보냈고 이 항복 연설을 들은 전 독일인들과 독일 병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는 모스크바로부터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보낸 축하 전보를 받았다. 6월 17일, 신임 프랑스 수상 [[필리프 페탱]]은 독일에게 휴전을 제의했고, 6월 22일 콩피에뉴에서 [[콩피에뉴 휴전협정|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 협정 체결 직전인 21일 뒤늦게 [[이탈리아 왕국군]]이 참전하긴 했지만[* 선전포고 자체는 6월 10일에 이루어졌지만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이탈리아군 수뇌부가 잘 알고 있었기에 병력 투입이 늦어졌다.],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역시나 신나게 얻어맞고]] 르네 앙리 올리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알프스군에게 패하며 극히 작은 영토 확장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6월 24일 로마에서 이탈리아-프랑스 사이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6월 25일 새벽 1시 35분을 기해 최종적으로 정전이 이루어지며,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0년 6월 22일, 히틀러는 파리 근교에 도착했고 프랑스에 역사적인 수치를 안겨줄 장면이 연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의 항복 사절단이 타고 온 열차의 객차를 프랑스에서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프랑스의 항복 조인식을 이 객차 안에서 진행했다.[* 조인식이 끝난 후 히틀러는 이 열차를 베를린으로 가져갔는데, 이 열차는 독일이 점점 패망해가기 시작하자 히틀러가 [[게슈타포]]에게 명령하여 이 열차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버렸다.] 프랑스에서는 제4집단군 대장인 [[샤를 욍치제]] 장군이 대표로 왔다. 독일 통역관은 프랑스가 이유 없이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는 내용의 비판 내용을 이야기했고,[* 물론 아주 엄밀히 말하면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지도 선제공격을 가하지도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의 군사협약에 따라 독일에 전쟁을 먼저 선포했고 독일영내로 선제 진군한쪽도 영국과 프랑스쪽이긴 했다. 실제로 히틀러 역시 폴란드 침공에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방위조약을 이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전포고에 히틀러는 날뛰며 이를 막지못한 리벤트로프를 비난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절대 넘지말라고 경고해둔 폴란드를 억지로 구실을 조작하여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한 것은 나치 독일이니 히틀러가 할 말은 아니다.] 이 비판이 끝난 직후 히틀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열차에서 내렸다. 프랑스 대표단에게는 휴전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한 가지 조건은 프랑스로 도피해온 반나치 독일인들을 모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욍치제가 협상을 해보려 시도했지만 독일은 거절했고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협상은 끝나버렸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상징했던 기념물들은 모두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히틀러와 병사들 또한 막 점령한 [[마지노 선]]을 보며 프랑스를 비웃었다. 프랑스 침공에서 전리품으로 탱크 2,000대, 대포 5,000문, 소총 30만 정과 400만 발에 달하는 총알을 얻게 되었고 또한 프랑스군에게 제공되려고 했던 [[셔츠]] 등 피복류들도 상당수 독일군이 가져가 버렸다. [[크릭스마리네]]가 접수한 프랑스 해군 보급창에서 프랑스 해군 수병용 [[텔냐시카|줄무늬 셔츠]]를 [[U보트]] 승조원들의 출동 중 입고 버리는 소모성 피복으로 써 버린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프랑스군의 총기들은 압류당하여 모두 독일군의 손에 쥐어졌으며 얼마 전까지 조국 프랑스를 지키던 [[르노 B1]], [[소뮤아 S35]] 등의 기갑차량들과 열차, 대포들은 모두 독일에게 양도되어 귀중한 무기로 쓰여졌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만약 프랑스가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독소전쟁 때 소련을 유린했던 독일군 소유의 프랑스 무기들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제대로 싸우지 않고 나치에 무기만 조공한 프랑스도 추축국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영국과 미국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저런 식으로 따지면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까지 독일과 붙어서 침략전쟁을 벌이고 독일에 물자를 퍼주고 불가침조약까지 맺은 소련이야말로 추축국에 가깝다.] 프랑스의 모든 공장과 항구, 그리고 모든 프랑스의 재산 역시 독일이 당연히 얻어야 할 전리품이 되었고, 전쟁을 선포한 것 또한 프랑스였으니 하루에 무려 1억 달러에 해당하는 독일의 점령비용을 프랑스가 부담할 몫이 되어버렸다. 한편 이 과정에서 수도를 비시로 하는 [[비시 프랑스]]가 태어났는데 수도가 비시로 정해진 이유에는 비시에 호텔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7월 초에 필리프 페탱 총리는 남은 정부인사들을 싹싹 끌어모아서 그들을 이끌고 함께 비시의 호텔로 들어갔다. 여담으로 히틀러가 프랑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에펠탑]]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 담긴 당시 영상이 있는데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에게는 프랑스 건국 이래 사상 최악의 치욕스러운 순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나치 깃발이 에펠탑에 독일군들에 의해 게양되는 모습 또한 프랑스에서는 최악의 치욕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